2017년 4월 23일 일요일

나의 치사함에 관하여

 사람이란 게 참 치사하다.
 그냥 내가 치사하다고 시작하면 되는 건데 그러지 못하고 ‘사람들’이라고 싸잡아서 말하고 싶다. ‘나’ 보다 더 넓은 단위의 ‘사람들’이라는 단위로 주체를 바꾸는 것은 '나 자신이 그렇다고 느껴서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만 나만 그런 건 아니지?’하는 일종의 방어기제다.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방어하는 꼴이니 어림도 없고 의미도 없다. 시작부터 구구절절이다.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내가 참 치사하다는 거다. 나의 치사함에 대해 써보고자 하는 글이니 적어도 이 글에서는 방어막을 걷어내고 덜 치사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야 하겠다. 사람이란 게 원래 참 치사한 건지 아닌지 하는 나도 잘 모르는 얘기는 접어두고 최대한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글을 써보고자 한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보자.

 나란 사람 참 치사하다.
 토요일이었던 어제 말도 안 되는 실수가 발견됐다. 그 덕에 팀 동료들이 그것을 수습하느라 주말에 곤욕을 치렀다. 별 생각없이 여유로운 주말을 보내고 있다가 핸드폰을 확인하니 윤재형에게 부재중 전화가 한 통, 팀 카톡방에 몇십 개의 카톡이 쌓여있었다. 무슨 일이 났구나. 불안한 마음을 안고 팀 카톡 방에 들어가 안 읽은 부분부터 위에서부터 읽어내려갔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일까. 잠시 표정관리가 안 되고 멍해지면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상황을 정리해봤다. 사용자들의 글 중 좋은 글들을 주제에 맞게 모아 모음이라는 묶음으로 보여주는 기능에서 해당 글 작성자의 필명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애써 쓴 글이 내 필명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보이고 있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한 사용자 분이 속상함과 당황스러움을 억누르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착하고 배려 깊은 항의 메일을 보내왔다. 그것으로 그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누군가가 그 사람의 글을 베꼈고, 나는 그 베낀 이의 글을 뽑아서 모음에 올려둔 것인가. 그 정도 생각을 해본 후 열심히 수습에 애를 쓰고 있는 대화에 참여했다.

 다시 대화에 들어갔을 땐 사태 파악이 조금 더 진전돼 있었다.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할 때 실수가 있었던 것이라는 진단이 내려졌고, 즉각 수정을 진행 중이었다. 추측했던 원인 중 하나인 무단 도용 가능성을 확실히 배제할 수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대화방에 질문했고, 무단 도용은 지금 문제의 원인에서 확실히 배제할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행이었다. 더 이상 이 상황 전체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무단 도용된 글을 선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것에 대해 다행스러운 마음이었다. ‘무단 도용 문제는 아니니, 그건 다행입니다. 더 신경 쓰고 확인했어야 했는데 부주의해서 서비스와 사용자에게 상처를 준 것에 그리고 이렇게 불필요한 고생을 하게 만든 것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진행되고 있는 상황의 급박함과 쑥스러움을 핑계로 ‘아하 다행이네’,  ‘쏘리’라는 말과 함께 울고 있는 이모티콘을 같은 마음으로 보냈다.

 어이없는 실수를 수습하며 곤두서있던 신경에 상황에 ‘다행이네’가 포함된 별 쓸모도 없는 말들이 화를 돋운 것인지 퉁명스러운 반응이 돌아왔고, 그 말들은 아프게 다가왔다. 억울했다. 단지 나도 일부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그때의 몹쓸 정신 상태와 부주의를 반성하고 팀의 소중한 주말에 균열을 준 것에 대한 진심 어린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믿어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당연히 상대방의 투박한 말들에도 생략되어 있는 말들이 많았을 것이며 텍스트 소통의 한계로 의미가 왜곡되어 해석됐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두가 내가 믿고 있던 데로 생각해주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상황이 일단락되고 나서 그 말이 머릿속에 그 말이 맴돌았다. 문제를 초래한 것은 나이고 그 문제 때문에 고생시킨 것이 먼저이니 무엇이든 달게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겉으로 그런 척하고 속으로는 쓴맛을 느끼고 있었던 것에 한 번 치사했고, 저 퉁명스러운 말들은 벌어진 상황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서 두 번, 지난날 타인의 실수에 대한 나의 반응과 배려를 철저히 주관적으로 떠올려본 것에 세 번 치사했다.

 기력 증진을 위해 종종 개고기를 먹였다던 양궁선수의 부모님과 그 선수에게 쌍욕으로 비난하면서 자신의 애견에게는 기력 증진을 위해 살살 녹는 소고기 업진살을 먹이던 이중성을 보며 그 사람의 치사함에 대해 치를 떨었는데,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수와 실수를 한 사람에 대한 반응은 의도가 어쨌든 누군가의 기분이 나쁘게 혹은 아프게 할 수도 있었으니 딸을 위해 개고기를 먹였던 양궁선수 부모님과 같고, 그것에 대한 나의 반응은 업진살 아주머니의 이중성과 오지랖과 같았다.

 요한복음 8:3-11에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이 불행한 여자를 연민하거나 잘잘못을 따져보자는 것이 아니다. 이 대목의 중심은 ‘먼저’에 있다. 돌로 칠 때 치더라도 그전에 나는 진짜 허물이 없는지 돌이켜 보라는 것이다. 살면서 치사한 일들을 참 많이 보게 된다. 그 치사함을 비난하기 것 이전에 나의 치사함을 먼저 되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보통 상대방만 치사하고 나는 전혀 치사하지 않았던 때가 없거나 거의 없기 때문이다.

2017년 4월 5일 수요일

퇴근길에 비가 내리면

 퇴근길에 발 디딜 틈 없는 버스에 타면 서로가 서로의 불쾌함이 되고, 그 불쾌함으로 인해 서로는 서로의 불행이 된다. 이런 날에는 괜히 창밖에 내리고 있는 비가 원망스럽다. 비가 내리는 탓에 사람들 사이의 그나마 있던 틈도 메워지고 있어서일까.

 사람들은 서로가 불쾌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떨어져 있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 비행기의 비즈니스 석에서 이코노미 석보다, 가격이 비싼 식당에서 싼 식당보다, 월세가 비싼 집에서 싼 집보다, 좋은 차에서 싼 차보다 더 멀리 다른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다.

 불쾌한 북적거림을 피하는 것에 돈을 지불하기 부담스러운 다수의 사람들은 서로를 자석처럼 끌어당기듯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