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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3일 화요일

기차에서

 추석을 맞아 기차를 타고 고향인 김천에 가는 중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꼬마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인지는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무엇인가를 애타가 찾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가 기차에는 그 무엇인가가 없다고 설명하며 애써 아이를 달래는 중이었다. 무엇을 저리 애타가 찾고 있을까 궁금해하던 중에 문득 나의 어린 시절 중 몇몇 장면들이 떠올랐다.

 내가 일곱 살, 유치원에 다니고 있을 때의 어렴풋한 기억이다. 연년생인 형과 같은 유치원을 다녔었고, 유치원을 마치고 나면 엄마가 차를 타고 데리러 오셨다. 형이 한 해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부터는 엄마와 둘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때의 나도 기차에서 칭얼대고 있는 저 아이처럼 막연하게 무엇인가를 찾곤 했다. 유치원에서 먹은 쿠키가 너무 맛있었던 날이면 그 쿠키를 찾으러 가자고 했고, 가지고 놀았던 유치원의 교구나 장난감이 너무 재미있었던 날이면 그 장난감을 찾으러 가자고 했다.

 그땐 미쳐 알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 그 기억들이 너무나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들떠서 쫑알대며 무엇인가를 찾을 때마다 엄마는 그 말도 안 되는 설명과 엉터리 묘사를 찬찬히 그리고 진지하게 들어주고, 함께 그 무언가들을 찾으러 다녀주셨다. 쿠키를 찾는 날에는 온 동네 제과점을 다 돌아다녔고, 장난감을 찾는 날에는 동네의 마트와 장난감 가게들을 뒤지러 다녔었다. 그렇게 세네 군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나는 제 풀어 지쳤고 그때쯤 엄마는 납득할만한 다른 대안을 제시하거나 다음에 다시 찾아볼 것을 제안해주셨다.

 분명 그때의 엄마도 나의 설명과 묘사로는 그 무엇인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것을 찾고 못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억누르거나 굴복시키려 하기보다 스스로 이해하고 인정하며 납득할 수 있도록 과정을 함께 해주었고 그것을 귀찮거나 낭비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러한 맥락의 기억하는 일들과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이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차곡차곡 쌓여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2017년 8월 20일 일요일

획일화된 교육의 부작용

 획일화된 교육에 의해 교육된 후에 인간은 일상 속에서 다양한 부작용들을 겪게 됩니다. 학창시절에 꽤나 비판적인 사고를 했었다고 스스로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돌이켜보니 전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비판적인 사고에 의해 비롯된 어떠한 실천과 행동도 존재하지 않았고요. 어렴풋이 부자연스러운 과정과 방법으로 교육받고 있다는 것을 속으로 생각해보거나, 기껏해야 한가로울 때 한 번씩 투털거려 본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용기 없이 정해져 있는 시스템에 누구보다도 착실히 적응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 반대편에서 퇴화해가고 있는 개성을 지켜내기 위한 어떠한 제대로 된 시도도 지속적으로 해보지 못 했습니다. 

 이제야 이따금씩 인지하게 되는 스스로의 한계는 그 시절의 안일함에 대한 대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중 하나는 획일화되고 보편화되어 있는 대열에서 잠깐 떨어져 나와 새로운 길을 갈 때 필요 이상의 불안함을 스스로 느끼고, 또 주변 사람들에게 느끼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학교 교육 안에서 정해져 있는 커리큘럼을 공부하고 있을 때에는 거의 느끼지 못 했던 불안함을 요즘 느끼고 있습니다. 감히 스스로 판단하건대 그때보다 훨씬 자유로우며 압도적으로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배우고 있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그러합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우리는 보편적인 방향을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으로부터 끊임없이 강요받곤 합니다. 다양한 개성들이, 그리고 그 다양한 개성들이 나아가는 방향이 이전 선례들 혹은 주변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 때문에 불안하게 느껴지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2017년 4월 23일 일요일

나의 치사함에 관하여

 사람이란 게 참 치사하다.
 그냥 내가 치사하다고 시작하면 되는 건데 그러지 못하고 ‘사람들’이라고 싸잡아서 말하고 싶다. ‘나’ 보다 더 넓은 단위의 ‘사람들’이라는 단위로 주체를 바꾸는 것은 '나 자신이 그렇다고 느껴서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만 나만 그런 건 아니지?’하는 일종의 방어기제다.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방어하는 꼴이니 어림도 없고 의미도 없다. 시작부터 구구절절이다.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내가 참 치사하다는 거다. 나의 치사함에 대해 써보고자 하는 글이니 적어도 이 글에서는 방어막을 걷어내고 덜 치사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야 하겠다. 사람이란 게 원래 참 치사한 건지 아닌지 하는 나도 잘 모르는 얘기는 접어두고 최대한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글을 써보고자 한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보자.

 나란 사람 참 치사하다.
 토요일이었던 어제 말도 안 되는 실수가 발견됐다. 그 덕에 팀 동료들이 그것을 수습하느라 주말에 곤욕을 치렀다. 별 생각없이 여유로운 주말을 보내고 있다가 핸드폰을 확인하니 윤재형에게 부재중 전화가 한 통, 팀 카톡방에 몇십 개의 카톡이 쌓여있었다. 무슨 일이 났구나. 불안한 마음을 안고 팀 카톡 방에 들어가 안 읽은 부분부터 위에서부터 읽어내려갔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일까. 잠시 표정관리가 안 되고 멍해지면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상황을 정리해봤다. 사용자들의 글 중 좋은 글들을 주제에 맞게 모아 모음이라는 묶음으로 보여주는 기능에서 해당 글 작성자의 필명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애써 쓴 글이 내 필명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보이고 있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한 사용자 분이 속상함과 당황스러움을 억누르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착하고 배려 깊은 항의 메일을 보내왔다. 그것으로 그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누군가가 그 사람의 글을 베꼈고, 나는 그 베낀 이의 글을 뽑아서 모음에 올려둔 것인가. 그 정도 생각을 해본 후 열심히 수습에 애를 쓰고 있는 대화에 참여했다.

 다시 대화에 들어갔을 땐 사태 파악이 조금 더 진전돼 있었다.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할 때 실수가 있었던 것이라는 진단이 내려졌고, 즉각 수정을 진행 중이었다. 추측했던 원인 중 하나인 무단 도용 가능성을 확실히 배제할 수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대화방에 질문했고, 무단 도용은 지금 문제의 원인에서 확실히 배제할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행이었다. 더 이상 이 상황 전체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무단 도용된 글을 선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것에 대해 다행스러운 마음이었다. ‘무단 도용 문제는 아니니, 그건 다행입니다. 더 신경 쓰고 확인했어야 했는데 부주의해서 서비스와 사용자에게 상처를 준 것에 그리고 이렇게 불필요한 고생을 하게 만든 것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진행되고 있는 상황의 급박함과 쑥스러움을 핑계로 ‘아하 다행이네’,  ‘쏘리’라는 말과 함께 울고 있는 이모티콘을 같은 마음으로 보냈다.

 어이없는 실수를 수습하며 곤두서있던 신경에 상황에 ‘다행이네’가 포함된 별 쓸모도 없는 말들이 화를 돋운 것인지 퉁명스러운 반응이 돌아왔고, 그 말들은 아프게 다가왔다. 억울했다. 단지 나도 일부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그때의 몹쓸 정신 상태와 부주의를 반성하고 팀의 소중한 주말에 균열을 준 것에 대한 진심 어린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믿어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당연히 상대방의 투박한 말들에도 생략되어 있는 말들이 많았을 것이며 텍스트 소통의 한계로 의미가 왜곡되어 해석됐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두가 내가 믿고 있던 데로 생각해주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상황이 일단락되고 나서 그 말이 머릿속에 그 말이 맴돌았다. 문제를 초래한 것은 나이고 그 문제 때문에 고생시킨 것이 먼저이니 무엇이든 달게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겉으로 그런 척하고 속으로는 쓴맛을 느끼고 있었던 것에 한 번 치사했고, 저 퉁명스러운 말들은 벌어진 상황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서 두 번, 지난날 타인의 실수에 대한 나의 반응과 배려를 철저히 주관적으로 떠올려본 것에 세 번 치사했다.

 기력 증진을 위해 종종 개고기를 먹였다던 양궁선수의 부모님과 그 선수에게 쌍욕으로 비난하면서 자신의 애견에게는 기력 증진을 위해 살살 녹는 소고기 업진살을 먹이던 이중성을 보며 그 사람의 치사함에 대해 치를 떨었는데,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수와 실수를 한 사람에 대한 반응은 의도가 어쨌든 누군가의 기분이 나쁘게 혹은 아프게 할 수도 있었으니 딸을 위해 개고기를 먹였던 양궁선수 부모님과 같고, 그것에 대한 나의 반응은 업진살 아주머니의 이중성과 오지랖과 같았다.

 요한복음 8:3-11에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이 불행한 여자를 연민하거나 잘잘못을 따져보자는 것이 아니다. 이 대목의 중심은 ‘먼저’에 있다. 돌로 칠 때 치더라도 그전에 나는 진짜 허물이 없는지 돌이켜 보라는 것이다. 살면서 치사한 일들을 참 많이 보게 된다. 그 치사함을 비난하기 것 이전에 나의 치사함을 먼저 되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보통 상대방만 치사하고 나는 전혀 치사하지 않았던 때가 없거나 거의 없기 때문이다.

2017년 4월 5일 수요일

퇴근길에 비가 내리면

 퇴근길에 발 디딜 틈 없는 버스에 타면 서로가 서로의 불쾌함이 되고, 그 불쾌함으로 인해 서로는 서로의 불행이 된다. 이런 날에는 괜히 창밖에 내리고 있는 비가 원망스럽다. 비가 내리는 탓에 사람들 사이의 그나마 있던 틈도 메워지고 있어서일까.

 사람들은 서로가 불쾌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떨어져 있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 비행기의 비즈니스 석에서 이코노미 석보다, 가격이 비싼 식당에서 싼 식당보다, 월세가 비싼 집에서 싼 집보다, 좋은 차에서 싼 차보다 더 멀리 다른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다.

 불쾌한 북적거림을 피하는 것에 돈을 지불하기 부담스러운 다수의 사람들은 서로를 자석처럼 끌어당기듯 살아간다.

2017년 3월 31일 금요일

오늘과 같은 하늘의 어느날

 3월의 마지막 날이다. 흐리고 우중충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가끔 떨어진다. 올 듯 말 듯한 비처럼, 봄은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다. 날씨는 종종 비슷한 날씨였던 지난 어느 날의 기억을 끄집어내곤 한다.

 길었던 겨울을 지나 봄으로 들어가는 초입, 딱 작년 이맘때에 울산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짐을 실은 용달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왔다. 그날도 오늘과 같은 흐린 하늘이었고 비가 조금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그 해의 겨울은 상상하기도 아득할 만큼 멀리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어느새 그 겨울도 왔다 가고 1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라면을 끓일 냄비도 커튼도 없던 원룸에 우당탕탕 도착했던 날, 막막하기만 했던 이곳도 이제 단골이된 고깃집과 자주 가는 미용실이 있는 익숙한 장소가 되었다.

 여전히 올해의 겨울도 상상하기도 아득할 만큼 멀리에 있다고 느껴진다. 아득하기만 한 올해의 겨울이 다시 왔다 가면 내년의 겨울의 끝에서 오늘의 하늘과 날씨를 다시 만나게 될까. 그리고 그때의 나는 올해 혹은 작년의 그날을 떠올리고 있을까. 

2017년 3월 28일 화요일

글을 통해 사람을 만나다.

 우리는 왜 글을 쓸까.

 영화 '동주' 를 봤다. 그리고 얼마 후 우연히 ‘송몽규’ 선생님 역을 맡았던 배우 박정민이 이번 영화에 임했던 마음가짐과 소감을 글로 남긴 것을 읽었다. 재미있게 본 영화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던 배우를 글로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이 배우 생각도 깊고 글도 재미있게 잘 쓰네’ 싶어서, 혹시나 하고 다른 글들이 있는지 찾아 보았다. 역시나 꾸준히 칼럼을 연재하고 종이책으로 출판까지 했던 글쟁이였다. 당장 책을 사서 읽어보고 더 깊은 팬이 됐다.

 단순히 새롭게 등장한 배우 중 한 명일 수 있었던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연기에 임하고 있는지, 연기자가 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어떤 과정으로 배우가 되었는지를 글을 읽으며 꽤 깊게 알 수 있었다. 앞으로 그 배우를 영화 속에서 만나게 된다면 표정, 말투, 몸짓 하나하나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전에도 토론의 달인 유시민을, 영화감독 박찬욱을, 방송인 허지웅을, 가수 이석원을 글로 만나면서 이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비로소 진짜 이 사람들 각자를 만난 기분이었다. 누군가를 글을 통해 만난다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을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전 보건 복지부 장관 혹은 현 작가 유시민의 생각과 발언들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방송에서의 허지웅의 말들이, 언니네 이발관(이석원)의 음악들이, 배우 박정민의 연기가 그 사람들의 글을 통해 조금 더 완전하게 다가온다.

2017년 3월 27일 월요일

뭣이 중헌디!

 다녔던 학교에서는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했다. (아직 졸업은 못했고 휴학 중이니 다니고 있는 학교라고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정말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수업 시간에 자발적으로 질문하거나 발표하지 못했는데 얼마 전에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조정래 작가님의 소설 ‘정글만리’에는 중국 북경대학교 학생들과 미국 유명 언론이 인터뷰를  진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인 유학생인 주인공은 영어 실력이 뛰어나건 부족하건 아랑곳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중국 학생들을 보고, 한국과 참 다르구나 하며 놀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여자친구에게 물어보는데 이 중국인 여자친구의 답변이 더 놀랍다. 여긴 중국이지 않냐는 것이다. 중국에서 영어를 조금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 흠이냐, 본인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 아니냐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했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나만 이런 게 아니고 한국인들 대부분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사람들에게 나의 모자란 영어가 비웃음거리가될 수도 있다는 쓸데없는 두려움이 있었고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표현을 고쳐보는 중에 기회는 지나가 버렸다. 아무리 인터내셔널 캠퍼스를 표방하고 있다고 한들 여긴 한국이고 한국인 학생이 90% 이상인데 말이다.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많이 있었겠지만, 나와 비슷했던 학생들은 괜히 서로가 서로를 움츠러들게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한 가지만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여긴 한국이다. 한국에서 영어에 조금 유창하지 않다는 것이 무엇이 흠이냐.
 살다 보면 종종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정작 중요한 것들은 따로 있는데 이상한 것에 온통 신경을 쓰고 움츠러들어 일을 그르치게 되는 상황. 영화 곡성의 명대사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뭣이 중헌디!”

2016년 7월 5일 화요일

돈은 어떻게 벌건데?

"돈은 어떻게 벌건데?"

요즘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듣는 질문이다. 
모두 같은 책을 읽은신 건지... 어떻게 이렇게 같은 표정을 하고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지 새삼 놀랍기도 하다. 
정말 아직 잘 모르기도 하고, 괜스레 심술궂은 마음이 일어 
"아직 잘 모르겠어요. 지금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뭐." 라는 식으로 대답해버리고 싶기도 하지만(실제로 그렇게 대답하기도 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된것은 이제 나조차도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싶다. 

시간을 거슬러 지난 1년여의 시간을 되돌아 보면
"우리가 이것을 완성해서 출시할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을 위해
작년 9월부터 올해 12월까지는 완성하고 출시하는 것 그 자체에 집중했고, 
"우리가 서비스를 이끌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을 위해
올해 1월 부터 6월 까지는 시작된 서비스를 잘 이끌고 발전시키는 일에 전념하여 지금까지 왔다. 
그땐 막막 했던 일들 중 대부분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꿈같은 일들을 몇번 겪었지만 그것도 지나가면 무뎌지고 덤덤해지고 앞에는 새로운 막막한 일들이 한가득이다. 

그래도 이것이 여러번 반복되면서 
'이것만 되면 그 뒤로는 다 순조로울 거야' 하는 순진한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고, 그 전보다는 하나하나의 일에 크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올해 연말에는
"돈은 어떻게 벌건데?"
조금 더 고상하게 말을 바꾸면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최소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갖출 수 있을까?" 라는 막막한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2016년 6월 7일 화요일

지금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나쁜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 같을 때에도
무엇이든 해야만 할때

우선 나쁜 것을 피하는 것이 나쁜 것일지
무엇이라도 해보는 것이 더 나쁜 것일지도
잘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해봐야만 할때

2016년 4월 16일 토요일

2016.4.16

 불광역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새롭게 개발될 씀 웹페이지에 대한 대략적인 그림을 그려보고 있었다.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져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항상 어렵다.
 윤재형이 문득
 "전문적으로 마케팅을 담당해줄 사람이 필요해. 우리는 그런 부분이 많이 부족하니까. 내가 일해봤던 회사에 마케팅 팀원은 ......"
 잠시 인턴으로 있었던 스타트업에서의 마케터의 역량과 역할 그리고 그 필요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내 머릿속에서 씀을 시작하던 때부터 가져온 한가지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지금의 구조에서 언젠가는 새로운 사람들이 더 합류하게 될텐데, 그것이 어떠한 형태가 좋을까 또 어떠한 범위까지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정답은 아닐지라도 몇가지 이야기를 통해 몇가지 원칙을 생각해 보았다.

 - 10B는 최대 10명을 넘지 않는 구조로서, 언제든 팀원 누구와도 직접 소통할 수 있으며 거쳐가서 의견을 전달해야 하는 구조를 만들지 않는다.

 - 어느정도 업무별로 균형을 생각해야 하기 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업무가 무엇일지 생각해서 누군가를 찾기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이 잘하는 것을 우리 팀에 어떻게 융화할 수 있는지를 보고 그런한 과정을 통해 팀에 합류할 사람을 찾는다. 그럼으로써 팀의 색깔과 개성을 만들어간다. (예를 들어 디자인이 우수한 팀, 개발을 잘하는 팀, 마케팅이 화려한 팀 등등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멋진 팀을 이뤄보고 싶다.

2016년 3월 30일 수요일

[씀: 일상적 글쓰기] 2016.3.31 낮, '농담'

<농담>

가볍게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 
능청스레 끼어 있는
실 없는 말 농담

아주 잘해야 칭찬을 듣고
잘하면 본전이며
보통으로 하면 안하니만 못하고
영 별로이면 ......

위험하니 더욱 스릴있고
가끔가다 빵 터지기라도 하면
그 쾌감은 배가 된다.

그러한 연유로
주변을 보면 대부분이 두가지로 나누어진다 
농담을 아주 자주 하는 사람과
거의 농담을 하지 않는 사람

농담에 가까운 이글도 쓰고보니
보통 혹은 영 별로인데
안쓰느니만 못했는데 싶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글이라는 것도
농담하는 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구나

아닌가? 사실 농담이야.


2016년 3월 29일 화요일

[씀: 일상적 글쓰기] 2016.3.30 낮, '그리운 이름'

<그리운 이름>

 그리운 이름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 중 몇몇은 지금까지 간간히라도 안부를 물으며 끈을 놓지 않고 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그저 그리운 이름 그 자체로 남아있다. 

 지나고 나서 알게된 것은 그 당시에 얼마나 친밀한가가 그 사람과의 관계가 얼마나 오래 이어질 것인가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외부적 영향이 주된 요인일 듯 하다. 예를 들어 사는 곳, 직장, 학교, 취미생활 등의 것들 말이다. 남녀 관계에 있어서도 친구관계에 있어서도 그러한 듯 하다.

 어쩌면, 외부요인이라는 것이 사람들 그 자체보다 더 많은 영향을 미칠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외부적인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서로의 부단한 노력이 있다면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는 상당한 비용이 들기 마련이고, 인간은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동물이므로 대부분은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취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바뀌어온 그리운 이름에 대한 개인적인 인식의 단계를 나눠보자면, 처음에는 나에게 소중한 이름들이 하나 둘 쌓여간다. 그 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부환경에 의해 조금씩 멀어져가는 소중한 이름들이 생긴다. 억지로라도 붙잡아 보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임을 의식하던 못하던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져 간다. 그러다가 이제는 나에게 남은 그리운 이름들을 그 자체로 두고 간진하는 방법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그리운 이름들을 잠시 꺼내 보았다가, 다시 그대로 넣어두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2016년 2월 12일 금요일

[2016.2.13 물음과 대답]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을 글로 정리해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2016.2.13 물음과 대답]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을 글로 정리해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분명한 것은 작년 9월부터의 여섯 달과 앞으로의 기간은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어떠한 시간보다 밀도 높았고 강렬했던 기간이라는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많은 것들이 남고 더 많은 것들이 떠나간다.

조금 더 생동감 있고 정확한 것들을 많이 붙잡아 두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때 그때를 돌이켜 보고 주변 사람들, 일어나는 일들
또는 사물에 대한 의미를 글로써 부여하는 일을 해보려 한다.

여러번의 비슷한 시도 끝에 무턱대고 "꾸준히 글을 써보자!" 와 같은
막연한 다짐은 지켜지기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여, 생각해낸 한 가지 방법은 하루 중 그때 그때 떠오른 질문, 물음을
공책 한 페이지 첫 부분에 기록해 두고,
가능한 빨리 그 질문에 대한 그 당시에 떠올린 대답을 적는 것이다.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이 글을 대답으로 삼고 질문을 붙여 본다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을 글로 정리해 두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정도가 된다. 


2015년 7월 2일 목요일

506-3 호의 책장앞에 서면

 506-3호의 책장앞에 서서 수십가지의 개발지식과 방법론의 제목으로 도배된 그 벽을 보고 있을 때면, 삭막하고 높은 담벼락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언젠가 다시 그 앞에 섰을 때 담벼락이 허물어지고 내가 가진 것들이 물감처럼 넘쳐 흘러 내 프로그램과 글들이 격 없이 흐르는 음악같은 그림과 같아 진다면.

2015년 6월 20일 토요일

시간을 아껴주는 서비스 혹은 어플리케이션

 요즘 기획되고 출시되는 수많은 서비스와 어플리케이션들이 이용자들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빼앗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이용자들의 시간과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어야 하겠다.

2015년 5월 2일 토요일

겨울의 벚꽃 봄의 눈

이따금씩 꽃이 펴야 하는 3월 봄에 눈이 내리기도 하지만
눈이 내려야 할 12월 겨울에 벚꽃이 피는 일은 없다. 

2015년 5월 1일 금요일

Where am I?

 게임이 점점 발달하며, 케릭터의 인공지능은 점점 높아져 현실의 사람과 거의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에따라 게임은 더 이상 현실같은 게임을 넘어 현실이 곳 게임인 세상이 되었다. 현실과 게임 속을 구분하는 방법은 게임에서 아직 구축되지 않은 맵에 우연히 도달하거나 게임의 엔딩 즉, 죽음 그 후를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캐릭터는 캐릭터 현실이 게임인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 게임 개발자의 장난으로 평화롭던 현실세계와 게임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개발자가 한 의심많은 캐릭터에게 게임세계에 대한 의심을 심고, 게임세계의 헛점을 서서히 보여주기 시작한다. 처음엔 공상으로 시작하여 몇가지 증거를 통해 확신으로 바뀌어 간다. 마침내 그 캐릭터는 자신의 세계가 게임세계라는 사실을 알게되고, 이 증거를 게임 세계에 알리려 발버둥친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캐릭터는 처한 게임현실에 대한 비관과 낙담으로 자살을 결심한다. 그는 자살하며 한마디 메세지를 남기며 죽는다.
"당신 또한 게임속의 게임 개발자이지 않은가..."

이 말을 들은 개발자는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그 혼란에 답을 찾지 못하고 하루하루 지쳐간다. 
마침내 개발자 또한 현실을 부정하게 되고 자신이 조종하던 캐릭터를 따라 자살 한다.

 마지막 장면은 게임 엔딩 장면이 아닌 장례식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