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8일 토요일

518민주화운동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 한강 '소년이 온다'를 읽고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18일 대한민국 광주에서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그날에 거대한 국가로부터 힘 없이 짓밟힌 개인과, 그 개인들이 살아온 그날 이후의 삶에 대해 차분히 서술한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수업시간에 혹은 영화에서 잠깐씩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접한 것이 전부였을 때까지는 1980년 5월 19일과 그 이후를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518민주화운동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자주 들어 익숙해진 이름의 역사속 수 많은 사건들을 전혀 모르고 있구나 생각했다. 

2017년 10월 23일 월요일

앱스토어 세대 (App Store Generation) - 9. 겨울방학 (2015년 12월)


- 9. 겨울방학 (2015년 12월)

 학기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됐다. 본격적으로 씀에 집중해 볼 계획으로 기숙사에 남았다. 학기가 마무리되기 전에 기필코 앱을 완성시키고자 했던 것도 이런 계획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학기가 진행되는 동안 틈틈이 앱을 완성시키고 방학기간 동안 몰아붙여서 승부를 보자는 심산이었고, 꽤 주요했다고 생각한다. 학교를 다니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자 할 때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이상적인 패턴이다. 학기가 진행되는 약 3개월은 프로젝트를 1차적으로 완성하기에 적당한 시간이고, 방학은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프로젝트를 발전시킬 수 있는 학생들만의 특권 같은 시간이다. 물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경우 더 긴 호흡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리 정해둔 완성 혹은 출시까지의 기간이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할 때에는 그것이 본인들의 역량에 맞는 일인지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진행한 프로젝트를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다음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검토해보고 결정하면 된다. 거창하게 회사를 만들거나 사무실을 얻거나 할 필요도 없다. 마음 맞는 친구 몇 명과 말 그대로의 프로젝트를 정해진 기간 동안 해보면 된다. 

 사족이지만 개인적으로 학교나 정부에서 ‘창업’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대학생들을 부추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부추기는 주체와 부추김을 당하는 대상 모두가 ‘창업’이라는 단어로 인해 본질에서 멀어지기가 너무도 쉽다는 것을 몇 년간의 경험과 관찰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음속에서 불꽃이 튀었고, 이것을 함께 할 친구 혹은 선후배가 있다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기간이 정해진 프로젝트를 통해 승부를 보자. 그것 외에 프로젝트를 방해하는 언어들이 있다면 머릿속에서 다 지워버리는 것이 좋다. 

 방학이 되면서 부모님의 경제적인 지원으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정했다. 걱정 어린 반대에 무릅쓰고 원하는 일을 하겠다면서 그것을 위한 생활비를 부모님께 받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12월 당시 통장에 약 50만 원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침 윤재형도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과외를 그만두었던 시기여서 돈이 없었다. 식비를 포함한 생활비, 서버 운영비용, 프라이머 관련 일로 함께 서울에 오가는 비용 등 다양한 지출로 잔고는 3주 만에 바닥났다. 다행히 일주일 후에 윤재형이 그전에 해둔 디자인 외주 비용이 입금되면서 그나마 버텨나갈 수 있었다. 그 사이 일주일 동안은 1+1 라면을 주식으로 현실 만 원의 행복을 찍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량한 얘기들이 많지만 그때는 마냥 즐거웠다. 하루는 컵라면만 먹기엔 허전해서 약간의 사치를 부려 양파링을 같이 샀다. 뜬금없이 양파링을 컵라면 국물에 찍어 먹어보고는 뜻밖에 맛있음에 감탄하며 신나했었는데, 지나고 나서는 이제 그럴 일도 없거니와 그러고 싶지도 않다. 

 씀 앱을 개선하고 추가 업데이트를 준비함과 동시에 씀에서 작성된 글을 모아 책으로 제작해서 전국에 독립 책방을 통해 판매했다. 내가 만든 앱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 숫자가 계속 늘어간다는 것과 출시 전부터 꿈꿔오던 '씀의 글로 책을 제작하는 일'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하고 설레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용자 규모가 조금씩 늘어갈수록 감사하고 설레는 기대감과 함께 막연한 불안감과 두려움도 동시에 커져갔다. 10명에서 100명, 100명에서 1,000명, 1,000명에서 10,000명 … 규모가 한 단계 늘어날 때마다 새로운 문제들과 마주했다. 땜질하듯 겨우겨우 상황을 모면하거나 문제가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적절한 해결 방법을 알지 못해 시간이 지체될 때마다 무거운 압박감을 느꼈다. 그리고 언제까지 이렇게 버텨나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출시 초기에 우린 이대로 끝이구나 했던 순간이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구글 플레이 스토어에 업데이트를 하기 위해 필요한 키 파일을 잃어버렸을 때이고, 다른 한 번은 약 2만 명 정도 사용자들의 글을 모두 지워졌을 때였다. 그 키 파일을 잃어버렸다면 더 이상의 업데이트를 진행할 수 없어서 몇 만 명이 다운로드했던 앱을 지우고 새롭게 올려야 했을 것이다. 그때까지의 사용자 수, 순위, 리뷰 등의 기록들이 다 사라지게 된다. 다행히 다시 찾긴 했지만 정말 아찔했던 기억이다. 이것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한순간에 사용자들의 글이 모두 사라졌을 때였다. 여느날처럼 새로운 기능 업데이트를 준비하고 있던 새벽이었다. 윤재형이 잘 못 입력된 글 데이터 한 줄을 지운다는 것을 실수로 테이블을(관계형 데이터베이스와 플랫 파일 데이터베이스에서 테이블(table)은 세로줄과 가로줄의 모델을 이용하여 정렬된 데이터 집합(값)의 모임이다.) 통째로 지워버렸다. 그땐 그런 실수를 방지할 만한 기초적인 장치들도 되어 있지 않았다. 망연자실했다.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몇 분간의 정적이 이어졌다. 정말로 이대로 끝이구나 싶었다. ‘그래, 지금까지의 행운이 말도 안 되긴 했지. 아쉽긴 하지만 우린 여기까지구나.’ 이런 자포자기한 생각으로 마음을 추슬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당시에 이용중이던 호스팅 업체(서버를 대여하는 서비를 하고 비용을 받는 업체) 긴급 장애 대처 서비스에 전화했다. 다행히 매일매일 자동으로 서버에 데이터를 백업해두고 있었다. 약 4시간 정도의 데이터를 제외한 나머지를 복구할 수 있었다. 소중한 글을 잃어버린 사용자분들 한 분 한 분께 사과드린 후 상황을 수습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문제들을 몸으로 부딪히며 지금까지 왔다. 그때 우리가 그렇게 망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순간들을 여러 번 거치면서 조금씩 멘탈도 단단해지고 여유도 생겼다. 미래의 있을 일들을 미리 걱정하며 지금 우리가 혹은 내가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가 항상 걱정이었는데, 자연스레 그런 걱정은 의미가 없고 순간 순간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얼마전 크게 공감했던 소설가 김연수님이 젊은 소설가들을 향해 쓴 문장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사랑하는 재능을 확인한 뒤에야 사랑에 빠지는 사람도 있을까?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젊은 소설가여, 매일 그걸 해라."



- To be continued...

2017년 10월 5일 목요일

앱스토어 세대 (App Store Generation) - 8. 5분의 대화 (2015년 12월)


- 8. 5분의 대화 (2016년 12월)

 그렇게 정신없이 12월의 중반을 넘긴 후, 피할 수 없는 기말고사 기간이 됐다. 하루 이틀 벼락치기로 공부해서 겨우겨우 시험을 치렀다. 저녁에 있을 마지막 과목 시험을 세 시간 정도 앞둔 긴박한(?) 오후였다. 건물 엘리베이터 안에서 포스터를 통해 그날 있을 학교 창업 관련 행사에 벤처기업 투자자 배기홍 대표님(스트롱 벤쳐스)이 방문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이대로 쭉 시험공부를 해야 할지, 아니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행사에 참가해서 투자자를 만나봐야 할지를 약 10초 정도 고민해봤다. 설치 수가 1만 명을 넘어가고 있었고,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더 진행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막막하던 때였다. 당장 투자를 받고말고의 문제보다 순수하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여쭤보고 싶었다. 또 가지 않고 남아 있는다고 해서 시험 공부가 잘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윤재형과 간단히 우리의 상황을 ppt로 정리해서 자료를 만들어서 행사장으로 갔다. 일말의 죄책감이 남아 있어 시험공부를 위한 자료들을 함께 가져갔지만 잘 될리가 없었다.

 그렇게 호시탐탐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행사가 각 팀들의 발표와 질의응답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어서 순서가 다 끝나고 나서 말을 붙일 수 있었다. 행사를 마치고 나가려는 분을 붙잡고 대략 이런 식으로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유니스트의 학부생 이지형, 이윤재라고 하는데요. 저희랑 잠깐 얘기하실 수 있을까요?"
“아 네 안녕하세요. 죄송한데 뒤에 일정이 있어서요. 지금은 조금 힘들 거 같은데. 무슨 일이시죠?”
행사 관련된 교수님 몇 분이 기다리고 계신 듯했다. 서로 난처해하며 3초간 정적이 흐른 뒤,
“저희가 앱을 하나 만들어서 출시했는데요. 한 달 만에 사용자가 만 명이 조금 넘었습니다. 이걸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 조언을 얻고자 행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음 그럼 시간이 많이는 없으니까요. 빨리 얘기해보죠.”
준비해 간 4페이지짜리 소개 문서를 보며 빠르게 설명해드렸다.
설명을 다 듣고 배기홍 대표님은 두 가지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둘이서 만든 거라고 하셨죠, 두 분 각자 역할이 뭐예요?"
“저는 개발을 맡았습니다.”, “저는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그럼 이거 그냥 학교 다니면서 사이드 프로젝트로 하는 거예요 아니면 진지하게 더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 거예요?”
“사이드 프로젝트의 단계는 지나갔다고 생각하고요. 진지하게 더 해보고 싶습니다.”
“오케이, 그럼 다음 주에 스카이프 한 번 해요. 메일로 연락드릴게요.”

 간결했지만 강렬했다. 내 생의 첫 번째 벤처 투자자와의 대화였다. 그리고 그분이 배기홍 대표님이었다는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우리 회사에 투자한 투자자로서 계속 만나 뵙고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진심으로 창업자를 대하는 것이 대화 때마다 느껴진다. 누군가 생에 처음으로 대화해야 할 벤처 투자자를 찾고 있고 있다면 강력하게 추천한다. (물론 첫 번째가 아니어도 좋다.) 그다음 주 약속했던 스카이프 미팅을 통해 조금 더 자세한 상황을 설명드리고 대화를 나눴다. ‘프라이머’(http://primer.kr/)라는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깃수 별로 초기 기업들을 발굴해서 투자하고 성장을 돕는 회사)를 소개해주셨고, 그 당시 모집 중이던 batch 9기에 지원했다. 순간순간 스스로 결정하기는 했지만, 긴박한 외부 상황 변화라는 거대한 물결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고 있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학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앱스토어 세대 (App Store Generation) - 7. 출시 후 일주일 (2016년 12월)


- 7. 출시 후 일주일 (2016년 12월)


 씀 안드로이드 앱을 마켓에 올리고 나서 첫 일주일은 2년여가 지난 지금에도 시간 단위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복기해 볼 수 있을 만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재미있거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들 몇 가지를 추려 시간 순서대로 쫓아가 보자.

 씀을 마켓에 올리고 난 다음날 주변 지인들 약 20명에게 출시를 알렸다. 그렇게 첫날 신규 가입자 수 2명 (나와 윤재형), 둘째 날 신규 가입자 수 15명(지인 20명 중)으로 서비스가 시작됐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셋째 날부터 새롭게 가입하는 사람들과 작성되는 글의 수가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3일 차에 회원 수가 100명이 조금 넘었고, 4일 차에 400명, 일주일이 되었을 땐 2,000명을 넘었다. 주변 지인들 중 몇몇이 자발적으로 트위터와 다음 카페 등에 소개해준 것이 발단이 되어 공유와 리트윗을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기말고사 준비는 이미 뒷전이 된지 오래였다.


 갑작스러운 사용량 증가에 전혀 대비가 안 돼 있었을 뿐 아니라 체계적으로 개발되지 못한 것들이 많은 까닭에 크고 작은 오류들이 메일과 카톡, 플레이 스토어 리뷰를 통해 실시간으로 보고되고 있었다. 1년 이용료가 10,000원도 채 안되는 착한 가격의 서버에 서비스가 돌아가고 있었다. 서비스 출시 후 일주일간 서버가 뻗고 확장하는 과정을 세 번 이상 반복했다. 또 당시 테스트 기기는 직접 사용하고 있던 LG g3 제품 한 대 뿐이었다. 그 한 대로 테스트를 한 후 앱을 출시했는데, 테스트하지 못했던 삼성 제품군에서 글 저장이 제대로 되지 않는 버그가 발생했다. 삼성 스마트폰을 쓰고 있는 후배를 불러 치킨을 사주며 앉혀둔 뒤, 잠시 스마트폰을 빌려서 버그를 고쳤다. 시간에 맞춰 자동으로 글감이 변경되도록 한 것은 앱 출시 후 대략 삼 주가 지난 후였다. 그전까지는 아침 일곱 시와 저녁 일곱시에 직접 글감을 변경했다. 때때로 늦잠을 자거나 잊어버리고 글감을 변경하지 못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삼 주간 그렇게 하고 나니 방식을 자동으로 변경한 뒤에도 얼마간은 아침 일곱 시만 되면 깜짝깜짝 놀라서 깨곤 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정말 기본적인 것들이지만, 그 당시에는 하나하나 직접 부딪히며 개선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충분히 준비된 상태는 아니긴 했지만, 흥분되고 설레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2017년 10월 3일 화요일

기차에서

 추석을 맞아 기차를 타고 고향인 김천에 가는 중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꼬마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인지는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무엇인가를 애타가 찾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가 기차에는 그 무엇인가가 없다고 설명하며 애써 아이를 달래는 중이었다. 무엇을 저리 애타가 찾고 있을까 궁금해하던 중에 문득 나의 어린 시절 중 몇몇 장면들이 떠올랐다.

 내가 일곱 살, 유치원에 다니고 있을 때의 어렴풋한 기억이다. 연년생인 형과 같은 유치원을 다녔었고, 유치원을 마치고 나면 엄마가 차를 타고 데리러 오셨다. 형이 한 해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부터는 엄마와 둘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때의 나도 기차에서 칭얼대고 있는 저 아이처럼 막연하게 무엇인가를 찾곤 했다. 유치원에서 먹은 쿠키가 너무 맛있었던 날이면 그 쿠키를 찾으러 가자고 했고, 가지고 놀았던 유치원의 교구나 장난감이 너무 재미있었던 날이면 그 장난감을 찾으러 가자고 했다.

 그땐 미쳐 알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 그 기억들이 너무나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들떠서 쫑알대며 무엇인가를 찾을 때마다 엄마는 그 말도 안 되는 설명과 엉터리 묘사를 찬찬히 그리고 진지하게 들어주고, 함께 그 무언가들을 찾으러 다녀주셨다. 쿠키를 찾는 날에는 온 동네 제과점을 다 돌아다녔고, 장난감을 찾는 날에는 동네의 마트와 장난감 가게들을 뒤지러 다녔었다. 그렇게 세네 군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나는 제 풀어 지쳤고 그때쯤 엄마는 납득할만한 다른 대안을 제시하거나 다음에 다시 찾아볼 것을 제안해주셨다.

 분명 그때의 엄마도 나의 설명과 묘사로는 그 무엇인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것을 찾고 못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억누르거나 굴복시키려 하기보다 스스로 이해하고 인정하며 납득할 수 있도록 과정을 함께 해주었고 그것을 귀찮거나 낭비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러한 맥락의 기억하는 일들과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이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차곡차곡 쌓여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2017년 10월 1일 일요일

앱스토어 세대 (App Store Generation) - 6. 출시를 향해 (2015년 10~11월)


- 6. 출시를 향해 (2015년 10~11월)

투썸플레이스에서

 '대부분 시간 소지하고 있는 스마트폰에서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자’라는 대략적인 방향을 정했다. 그 후 약 한 달 정도의 토론과 세부 기획 과정을 거쳐 더 살을 붙이고 다듬어 갔다. 학기가 진행 중이었다. 저녁 6시까지는 수업, 과제, 모임 등의 학교 활동을 주로 했고, 그 후 윤재형과 만나서 작업을 진행했다. 지난 경험상 학교를 다니면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각 구성원들이 전업(풀타임)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흐지부지되기가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프로젝트를 끝까지 끌고 가서 완성하는 것은 지난하고 처절한 과정을 견뎌내는 인내력과 지구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프로젝트 초기에 들떠있는 구성원들의 서로를 격려하는 언어와 결의 만으로 지켜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기필코 프로젝트를 완성시키기 위해 규칙과 목표를 한 가지씩 정했다. 규칙은 매일매일 함께 쏟을 수 있는 현실적인 시간을 정해서 그 시간에는 과제가 있던 친구의 생일이 있던 다 상관없이 프로젝트에만 집중하자는 것이었고, 목표는 12월 1일까지 앱을 완성해서 구글 플레이 스토어에 출시하자는 것이었다. 함께 정한 시간은 매일 저녁 여섯 시부터 대략 자정 전까지의 밤 시간이었다. 몇몇 카페를 전전하다가 어느 날부턴가 학교에서 버스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투썸플레이스에만 갔다. 우리는 세 달 남짓한 기간 동안 그 규칙을 철저히 지켰다.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니면 매일 같이 카페에 갔다. 결론적으로 씀은 목표 일보다 3일 늦은 12월 4일에 스토어에 출시됐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말하자면 씀이 나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규칙을 잘 지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씀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의 세 달은 기획, 제작, 마무리(출시 준비) 작업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9월 한 달은 아무런 코딩을 하지 않은 채 앱 기획에만 집중했다. 경험과 실력이 현업에 있는 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가지고 있는 자원과 한계를 더 확실히 파악하고 그 안에서 철저한 기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루 이틀 만에 얼렁뚱땅 기획을 끝내고 허겁지겁 개발에 들어갈 수도 있었겠지만(실제로 이전에 다수의 프로젝트를 그렇게 망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 달간 앱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하고 대화하며 기획을 완성했다. A4용지를 스마트폰 화면만 한 크기로 잘라 모든 화면을 그곳에 그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종이 프로토타입을 카페 책상에 순서에 맞게 책상에 쭉 펼쳐두고 수 없이 추가, 제거, 재배치의 과정을 거쳤다. 그 속에서 ‘씀’이라는 이름도 정했다.

종이 프로토타입

 결코 완벽하진 않았지만 제작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기획이 무르익었다고 생각했던 10월 초부터 본격적인 제작 작업을 시작했다. 서버와 DB에 대략적인 기초를 잡은 뒤 기획돼있는 화면을 순서대로 만들어 나갔다. 중간중간 막힌 부분들이 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순조롭게 작업이 진행됐다. 11월의 마지막 주가 됐을 때 약 80% 정도가 완성되었고 마무리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 막바지 마무리가 가장 지치고 고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젠 정말 끝났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버그나 추가해야 할 것들이 생겼다.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 않았다. 목표했던 12월 1일이 되었지만 완성하지 못했다. 12월 1일을 출시일로 정한 것에는 세 달 정도의 기간이면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늠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12월 중순에 있는 학기 기말고사 기간 전에는 마무리를 짓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완성하지 못한 상태로 연달아 기말고사와 겨울 방학을 맞이한다면 이 프로젝트의 수명은 거기서 끝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궁지에 몰린 마음으로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고 쪽잠을 자면서 마무리 작업에 매달렸다. 그렇게 3일이 더 지난 12월 4일에 완성된 앱을 구글 플레이 스토어에 출시할 수 있었다. 그날 오전 열 시쯤에 밤을 새우고 들어간 수업 맨 뒷자리에 앉아서 출시 버튼을 눌렀다. 그때의 기분은 성취감이나 후련함보다는 찝찝함과 자괴감에 더 가까웠다. 겨우겨우 완성해서 쫓기듯 출시는 했지만 부족한 것과 출시를 위해 포기해야 했던 것이 많았고, 처음 기대보다 훨씬 못 미치는 앱을 출시했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수업을 마치고 윤재형과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마시며 각자 느낀 기분에 대해 얘기했다. 다음엔 더 잘 해보자며 서로를 격려하는 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부족했던 잠을 보충한 후에 당분간은 그동안 소홀했던 기말고사 준비에 집중하기로 했다. 

2017년 9월 27일 수요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나.

스튜어트 밀 '자유론'을 읽고

 학교와 사회의 획일화된 교육 후에 인간은 일상 속에서 다양한 부작용을 겪게 된다. 학창시절에 꽤나 비판적인 사고를 했었다고 스스로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돌이켜보니 전혀 그렇지 못했던 같다. 사고는 종종 비판적일 있었으나, 사고에 의해 비롯된 어떠한 실천과 행동도 존재하지 않았다. 용기 없이 정해져 있는 시스템에 누구보다도 착실히 적응하려고 애를 썼지만, 반대편에서 퇴화해가고 있는 개성을 지켜내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제대로 지속해보지 못했다. 20 이전까지의 나의 삶에는자유라는 주제가 수면 위로 떠오를 틈조차 없었다. 돌이켜보면 스스로 의아할 만큼 맹목적이었고 순종적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청소년들 대부분이 그렇기에 또한 어쩔 없이 휩쓸려 버린 것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래서 자유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남성의 경우 2년여의 복무 기간을 제외하고 나면 심각하게 자유를 침해받거나 박탈 당하는 일은 없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에 의해 박해 당하거나(종교가 법적인 혹은 사회적인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경우를 제외하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맹목적인 노동이 부당하게 강요되는 등의 일들이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일어날 없다. 작게 봤을 종종 퇴보하기도 하지만 크게 보면 역사는 개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합리적으로 보장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현재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개개인이 누리고 있는 정도의자유 기반으로 딛고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자유의 방향과 목적지는 어디일까. 짧은 생의 경험에서 비롯하는 고민과 통찰은 미천할 수밖에 없지만, 들떠있는 얘기를 떠들기보다는 피부로 느낀 것에 대해 써보려 한다. 

 쳇바퀴를 도는 듯한 학창시절을 벗어나서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이 스스로에게 주어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있나.” 원하는 삶의 의미 범위가 처음에는 직업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점차 그대로의 전반으로 확장돼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있는 자유가 무엇인가와 충돌할 있다는 것을 알게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주변 사람들 특히 부모님께서 나에게 기대하는 일들과 달라지기 시작하면서였다. 아버지의 질문은네가 가장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돈이냐, 명예냐 아니면 다른 무엇이냐.’였다. 돈과 명예 같은 것들도 있으면 좋겠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이라고 말씀드렸다. 체념하듯그래 네가 하고 싶은 데로 해봐라고 하셨지만, 전혀 좁혀질 없는 거리가 느껴졌다. 범죄를 일으키는 것도 경제적인 지원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봐줬으면 하는 것이었다.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그에게 좋다는 이유로, 타인들이 보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다거나 혹은 심지어 올바르다는 이유로 그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도록 강제되는 것은 정당화될 없다. 이것들은 그에게 충고하거나, 그와 함께 따져보거나, 그를 설득하거나, 나아가 그에게 간청하기에는 좋은 이유들이지만, 그를 강제하거나 혹은 그가 달리 행동할 경우 그에게 해를 가하기에는 좋은 이유들이 아니다.’라는 자명한 사실이 받아들여질 없다는 것이 답답했다. 

 주변의 걱정 어린 강요를 무릅쓰고 획일화되고 보편화되어 있는 대열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길을 가는 중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회의감이 이따끔씩 찾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학교 교육에서 정해져 있는 커리큘럼을 공부하고 있을 때에는 거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때보다 훨씬 자유로우며 압도적으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배우고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렇다. 

 나이가 많든 적든 우리는 보편적인 방향을 자신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끊임없이 강요받곤 한다. 다양한 개성들이, 그리고 다양한 개성들이 나아가는 방향이 이전 선례들 혹은 주변 사람들과 다르다는 때문에 불안하게 느끼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우리 시대의자유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있는자유로 점차 진보하길 바라며, 필연적으로 그렇게 것이라고 믿는다. 개개인의 개성의 힘과 개성에 대한 자유의 중요함을 역설하는 속의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민족은 일정한 시기 동안 진보한 다음 멈추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 멈추는가? 그것은 민족이 이상 개성을 소유하지 않을 때이다.’

2017년 8월 24일 목요일

앱스토어 세대 (App Store Generation) - 5. 학교는 거들 뿐 (2015년 9월)


- 5. 학교는 거들 뿐 (2015년 9월)

학교는 거들 뿐...

 2015년, 학교에 입학한지 2년 하고 반이 지났다. 2학기가 개강하던 날, 수업을 마치고 늦은 저녁에 학교 안에 있는 카페에서 윤재(이윤재)형과 인중(정인중)이를 만났다. 대화의 주제는 '이번 학기에는 조금 더 제대로 딴짓을 해볼 건데, 뭘 할까'였다. 개강 첫날, 새 전공책에 적어둔 이름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작당모의라니. 참 안될 학생이었다. 그렇지만 내 길은 내가 가는 것이다. 학교는 거들 뿐이다.

 재미있는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왔다. 그 중 일상에서 푸시 알람으로 질문을 던지고 간단하게 답을 하면 질문과 답이 자동으로 가공되어 하루의 일기가 되는 앱 서비스를 만드는 것에 의견이 모아졌다. 프로젝트의 가칭은 ‘Memorandum(비망록)'이었다. 처음에는 ‘오늘 기분이 어때?’, ‘점심은 뭐 먹었어?’, ‘날씨가 어때?’ 와 같이 간단하고 공통적인 질문을 하고 사용자의 답을 조합하여 투박한 문장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질문을 더 다양하게 만들고 사용자의 대답과 매끄럽게 합쳐서 한 편의 일기를 만들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그런데 이틀 만에 프로젝트의 아이디어와 기획이 전면 수정돼야 했다. 인중이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프로젝트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인중이는 학교 앱 개발 소모임 ‘님부스’에서 만난 한 학년 후배 동생인데, 프로그래밍에 정말 뛰어났다. 자동으로 개인화된 질문을 만들고, 그 질문과 대답을 하나의 글로 만드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에 자신감을 보였다. 그 당시 나도 이 친구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프로젝트가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부분을 담당할 사람이 빠지게 되었으니 더 이상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자동화를 시키지 못한다면 모든 질문을 직접 만들어야했다. 그런 획일적인 질문에 사용자들이 대답하는 방식은 매력적이지도 않고 자연스럽지도 않았다. 그리고 공대생 남자 둘이서 스토커처럼 지속적으로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리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더 이상 우리도 굳이 거기에 매달려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인중이가 같이 못하게 된 것은 아쉽고 안타까웠으나, 안타까운 것은 안타까운 것이고 프로젝트를 다시 실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윤재형과 나 둘이서 다시 머리를 맞댔다. 완성할 수 있으면서 사람들이 사용할 가치가 있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Memorandum’에서 대부분을 걷어내고 우리가 좋다고 느낀 지점이 어디인가를 다시 되짚어보았다. 일기가 아닌 글 전체로 범위를 넓히고, 사용자들에게 던지는 질문 대신 글쓰기에 영감을 줄 수 있는 글감을 제공하기로 했다. 살펴보니 의외로 스마트폰에서 글쓰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딱히 없어 보였다. 글쓰기에 익숙치 않거나 지속적으로 글쓰기가 어렵지만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 혹은 더 이상 페이스북과 같은 SNS에는 내 글을 올리기가 껄끄럽게 느껴지기 시작한 나 같은 사람이 전국에 최소한 1,000명은 있지 않을까. 처음 제대로 앱을 내놓는 것 치고는 꽤 괜찮은 목표라고 생각했다.

2017년 8월 20일 일요일

획일화된 교육의 부작용

 획일화된 교육에 의해 교육된 후에 인간은 일상 속에서 다양한 부작용들을 겪게 됩니다. 학창시절에 꽤나 비판적인 사고를 했었다고 스스로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돌이켜보니 전혀 그렇지 못했던 같습니다. 또한 비판적인 사고에 의해 비롯된 어떠한 실천과 행동도 존재하지 않았고요. 어렴풋이 부자연스러운 과정과 방법으로 교육받고 있다는 것을 속으로 생각해보거나, 기껏해야 한가로울 번씩 투털거려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용기 없이 정해져 있는 시스템에 누구보다도 착실히 적응하려고 애를 썼지만, 반대편에서 퇴화해가고 있는 개성을 지켜내기 위한 어떠한 제대로 시도도 지속적으로 해보지 했습니다. 

 이제야 이따금씩 인지하게 되는 스스로의 한계는 시절의 안일함에 대한 대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중 하나는 획일화되고 보편화되어 있는 대열에서 잠깐 떨어져 나와 새로운 길을 필요 이상의 불안함을 스스로 느끼고, 주변 사람들에게 느끼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학교 교육 안에서 정해져 있는 커리큘럼을 공부하고 있을 때에는 거의 느끼지 했던 불안함을 요즘 느끼고 있습니다. 감히 스스로 판단하건대 그때보다 훨씬 자유로우며 압도적으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배우고 있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그러합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우리는 보편적인 방향을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으로부터 끊임없이 강요받곤 합니다. 다양한 개성들이, 그리고 다양한 개성들이 나아가는 방향이 이전 선례들 혹은 주변 사람들과 다르다는 때문에 불안하게 느껴지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앱스토어 세대 (App Store Generation) - 4. 작지만 소중한 성과들 (기숙사에서 하와이까지)


- 4. 작지만 소중한 성과들 (기숙사에서 하와이까지)

 일반인에게 무료로 프로그래밍을 알려주는 온라인 사이트 '생활코딩'을 운영하고 있는 egoing 님은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가를 수 있는 합리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아무리 오래 프로그래밍을 한 사람도 프로그래밍의 모든 것에 대해 알 수 없으니, 전문가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상태'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휴학을 한 1학기는 비전문가에서 전문가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앱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기까지 필요한 것들 중에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또 무엇이 필요한지를 하나하나 알아가고 있었다. 휴학을 하니 학기를 진행할 때보다 시간이 몇 배로 빨리 가는 듯했다. 학과 수업과 동아리 활동 등 분산되어 있던 하루를 하고 싶은 일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소중한 시간이었다.

 내가 휴학을 하고 얼마 뒤, 같이 룸메이트로 방을 쓰던 윤재형도 휴학을 했다. 깊게 들어가 보면 본인만 아는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크게 보아선 비슷한 이유에서 휴학을 결정했던 것 같다. 주로 방에서 치킨을 먹다가 혹은 각자의 침대에 누워서 잠들기 전에 많은 얘기를 나눴다. 서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상한 말들을 하다가 낄낄대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간간이 의미 있는 대화도 쌓여 갔다. '아직 실력은 모자라지만 우리가 조금 더 성장하면 이런 것을 해보자.' 대략 이런 식으로 대화가 시작됐었다. 누군가 한 사람이 시작을 하면 마치 탁구 공이 오가듯 긴 대화가 이어졌다. 평소에 사는 방식에 있어서 많은 것이 다르지만 이럴 때는 정말 죽이 잘 맞았다. 하나의 아이디어를 앱으로 출시하는 초기 전략에서부터 글로벌 시장에까지 진출한 후 수억 명의 유저를 보유하는 모습까지 머릿속에서 상상을 뻗어 나갔다. 어떤 날은 저녁 무렵 치킨 먹을 때부터 시작하여 계속 얘기를 하다 보니 동이 트고 닭이 우는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산 골짜기에 있는 학교에서 밤을 지새운 새벽에는 닭이 우는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언제나 결말은  우리가 하와이 해변에서 성공을 자축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대화의 여정을 '하와이에 간다'라고 불렀고, 기숙사 1603호 1번 방에서 숱하게 하와이 여행을 다녀왔다. 지금도 종종 느끼는 것이지만, 한없이 불안하고 막막할 때에는 망하더라도 같이 망할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된다. 정말이다. 이때는 실감하지 못했지만 많은 것의 시작이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와이는 아직 못 가본 관계로 비슷한 마카오 사진이라도..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1학기와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를 맞았다. 주전공은 컴퓨터공학 부전공은 산업디자인으로 새롭게 전공을 정했다. (학교 정책상 부전공이 필수다.) 공교롭게도 윤재형의 주전공은 공학디자인 부전공은 컴퓨터공학이었다. 크로스로 전공이 겹치는 탓에 대부분의 수업을 같이 들었다. 이따금씩 서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주었지만 우리의 조합은 디자인과 프로젝트 수업에서 빛을 발했다. 디자인과 수업 중에도 Interactive design 혹은 Physical computing 같이 코딩을 활용할 수 있는 수업을 골라서 들었다. 세 학기에 걸쳐 '100원을 내고 가위바위보 게임을 할 수 있는 로봇', '불이 들어오고 게임을 할 수 있는 인터렉티브 계단', '스마트폰의 라이트와 터치스크린을 활용한 탁상 스탠드', '각 앱 별 하루 사용시간을 측정한 데이터를 모래시계(구슬 활용)로 피지컬 하게 보여주는 기기'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다. 개발자든 디자이너든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서 일하기 전에 본인의 욕구를 온전히 반영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서 완성시켜보는 경험은 꼭 필요하다. 기계적으로 개발 혹은 디자인을 할 수 있는 부품과 자신만의 영혼이 있는 제작자의 차이는 거기에서 온다고 믿는다. 그렇게 마음껏 뛰어놀듯이 진행해본 몇 번의 경험이 두고두고 큰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같이 앱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해 볼 동료들을 갈망하던 내게 때마침 빛과 소금 같은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학교에서 '님부스'라는 앱 개발 소모임을 하고 있던 친구들이다. 구성원은 총 열몇 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주축은 컴퓨터공학과를 전공 혹은 부전공 하던 동기, 후배 6명 정도였다. 열정 있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앱 프로젝트를 진행하니 혼자서 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활기가 있었다. 주로 빈 교실이나 휴게실에서 만났는데, 자체적으로 간단한 앱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굵직굵직한 학교 기관들에 필요한 앱을 만들어주고 작게나마 돈을 벌기도 했다. 이쯤 되면 학교를 다니면서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지 하는 궁금증이 생길 법한데, 철저히 선택과 집중을 했다. 학점은 보통 정도만 유지하면 만족이었고, 그렇지 않아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을 닥치는 대로 마음껏 해보면서 도중에 좌절된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 완성시켜 매듭을 지었다. 작지만 소중한 성과들이 쌓이면서 조금 더 욕심이 났다. 수업 프로젝트로서 끝나거나, 개인적인 만족 혹은 작은 돈벌이로 끝나는 프로젝트가 아닌 누군가가 진짜로 사용하는 앱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때까지는 그저 내 생각과 의도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그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닿는 것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의 라이트와 터치스크린을 활용한 탁상 스탠드' 프로젝트의 사진들)



2017년 8월 18일 금요일

앱스토어 세대 (App Store Generation) - 3. 첫 번째 전환점

1. 앱스토어 세대의 시작
2. 학교 창업팀

- 3. 첫 번째 전환점



 스무 살, 스물한 살 이맘때의 장점들 중 하나는 그때까지의 인생에서 딱히 쌓아둔 것이 많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일에 뛰어들거나 기존에 정해둔 방향을 전환하기가 비교적 수월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방어적인 결정들을 하는 듯하지만 말이다. ) 이런 특성을 잘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한 것인지 내가 다닌 학교는 전교생이 '기초과정부'라는 공통과정 1년을 거쳐 2학년 때 세부 전공을 정하도록 했다.

 원래는 2학년이 되면 기계과를 갈 계획이었다.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항공 우주 관련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공부한 후 한국에도 Space X 와 같은 회사를 창업하겠다는 나름의 원대한 꿈이 있었다. 하지만 대학교에 실제로 와서 경험해보니 우주를 개척하는 회사를 설립하는 것은 너무도 막막해 보이는데 모바일 앱으로는 당장이라도 무엇인가에 도전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고등학교 때 당시 앱 개발의 꿈을 잠시 마음에 묻어둔 것처럼 우주 산업에 대한 꿈을 잠시 마음에 묻어두기로 했다.

 1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이 되면서 시작한 안드로이드 앱 개발 공부는 여전히 밑바닥을 허우적대고 있었지만 전혀 진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2학년 1학기가 되어 예정대로 기계과에 진학하여 기계과의 수업을 들으면서 남는 시간에 안드로이드 앱 개발 공부를 지속했다. 하지만 온통 앱 개발에 마음을 뺏겨 기계과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대로는 둘 다 제대로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1학기를 휴학하고 개발 공부에 집중한 후에 2학기에 컴퓨터 공학과로 본 전공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개 아니지만 그 당시로서는 꽤 큰 결심이었다. 부모님의 걱정 어린 반대와 혼자서 주변 친구들과 다른 길을 가야 한다는 불안감을 넘어설 어떠한 논리적인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본능적인 직감에 따라 결정했다.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두고두고 후회할 결정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1학기를 시작한 지 두 주 만에 휴학한 후로부터 다시 2학기가 시작하기 전까지의 약 6개월은 내 짧은 인생을 통틀어 가장 처량하고 비참했던 시간이다. 일단 저질러 놓았으니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마음만 앞서서 조급해졌고, 반대로 성장은 더디게만 느껴졌다. 돌이켜봤을 때 내게 없어선 안될 시간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안내 음성도 없이 걸어가고 있는 듯했다.

 혼자 책과 구글을 뒤져가며 개발을 하면서 지치기도 했고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너무 많이 겪는다고 느꼈다. 누군가 개발을 잘하는 사람에게 배우면서 더 빨리 실력을 키우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것인지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기관, 기업에서 실행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찾아봤다. 주로 서울이나 부산에서 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서울이 낫겠지 싶어 서울에서 진행 중이던 삼 주 짜리 안드로이드 앱 개발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로 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친구의 좁은 방에 얹혀서 지내기로 하고 무작정 올라왔다.

 개발 교육 프로그램을 한 번 듣고 나면 실력이 폭풍 성장해서 원하는 앱을 다 만들어 낼 수 있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현실에서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삼 주 짜리 교육 프로그램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현장의 분위기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비슷한 또래와 수업을 듣는 것에 익숙했는데 그곳의 연령층은 평균적으로 삼십 대를 웃돌았다. 그 교육 프로그램의 목적 자체도 본인의 프로젝트를 제작하는 것보다는 최대한 빠르게 취업할 수 있도록 돕는데 있었던 것 같다. 조급한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프로그램을 이수했지만 수업을 듣는 내내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친구의 자취방과 교육장을 매일 지하철로 오가며 '엄청난 성공 그런 건 이제 모르겠고, 그저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만드는데 온통 시간을 쏟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만이라도 빨리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절대 지금의 날들을 잊지 않고 감사히 시간을 보내야지.' 하고 속으로 다짐했다. 사람은 제각기 절실하지만 세상은 일관적으로 완고하다. "안돼 돌아가"라고 말하는 서울을 뒤로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되 하루하루 온전히 개발에 집중하는 시간을 늘려가고자 애썼다. 여러 방황 끝에 알게 된 것은 해야만 하는 것도, 할 수 있는 유일한 것도 그것뿐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종종 주변에 누군가가 개발을 시작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고 조언을 구한다면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한다. "하루에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좋으니 스스로에게 적정한 시간을 정해두고 꾸준히 개발에 집중해보세요. 책을 보든 구글링을 하든 유튜브 영상을 보든 다 좋습니다. 돌이켜 봤을 때 방법이 무엇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4. 작지만 소중한 성과들 (기숙사에서 하와이까지)
5. 학교는 거들 뿐
6. 출시를 향해
7. 출시 후 일주일
8. 5분의 대화
9. 겨울방학

2017년 8월 12일 토요일

앱스토어 세대 (App Store Generation) - 2. 학교 창업팀 (2013년 9~12월)


- 2. 학교 창업팀 (2013년 9~12월)

학교 창업팀 Project M


 창업팀은 내가 들어가기 6개월 전에 만들어졌고 여러 학과의 선배 다섯 명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다섯 명의 충원으로 총 열 명의 팀이 됐다. 그때가 2013년의 늦여름, 1학년 2학기였다. 낮에는 학교 수업을 듣고 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창업팀 일을 했다. 그전에는 친구들을 만나거나 동아리 활동을 했던 시간을 온전히 창업팀에 쏟았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때는 창업 경진 대회가 정말 많았다. 도서관의 스터디룸, 빈 강의실을 전전하며 열띤 토론을 하고 기획서를 작성해서 다양한 창업 아이템 경진 대회에 지원했다.

 다수의 대회를 경험하며 대회 수상의 요령을 터득하게 되어서 몇몇 대회에서 연달아 입상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하고 뭔가 될 것만 같은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가는 상장과 상금이 팀의 성장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기획력을 가진 팀들을 발굴하고, 상금 혹은 지원금을 줘서 그것들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대회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금과 지원금을 받은 뒤 그것으로 실제 제품을 제작하는 것보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획으로 다음 대회에 지원해서 상금을 쌓아가는 것에 더 매달렸다.

 꽤 큰 규모의 시상식에 참가하러 팀 전체가 코엑스에 간 일이 있다. 분명 기쁜 일로 왔지만 와서는 안될 곳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다시 학교가 있는 울산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그것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 후로부터 아이디어를 토론하고 문서화하며 그렇게 완성된 기획서로 대회에 지원하는 등의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탁상공론. 수십 개의 앱 서비스 아이디어로 수십 개의 대회를 나가면서도 끝까지 제대로 진행되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그때까지 받았던 상금, 지원금을 끌어모아 외주를 몇 번 맡겨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우리가 우리의 일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는데, 외주 업체가 그것을 알고 만들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면서 한 학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한 학기 동안 창업팀 활동을 하는 내내 머릿속에 있던 질문에 대한 답이 어느 정도 명확해졌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서비스를 직접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최소한 뭐라도 시작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응당 필요한 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정직하게 들이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작은 규모일지라도 직접 만들기로 결심하고 앱 개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역시 세상에 공짜로 되는 일은 없다.

앱스토어 세대 (App Store Generation) - 1. 앱스토어 세대의 시작 (2013년 9월)



- 1. 앱스토어 세대의 시작 (2013년 9월)

"자 여러분 앱스토어 시대입니다!"


 X 세대, 88만 원 세대, 베이비붐 세대 등 각 세대를 정의하는 다양한 말이 있다. 나는 스스로를  '앱스토어 세대 (App Store Generation)'라고 정의한다. (편의상 구글 플레이스토어와 애플 앱스토어를 모두 포함하여 앱스토어라고 부르기로 한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앱스토어가 끼친 영향은 한 세대를 규정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폰 혹은 스마트폰 세대가 아닌 앱스토어 세대다. 아이폰이 이끌어낸 혁신의 본질은 오히려 앱스토어에 있는 게 아닐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돌고 도는 얘기일 수 있지만 앱스토어의 의미를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내가 겪어온 앱스토어 세대에 대해 써보려 한다.

 한참 시간을 거슬러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으로 되돌아가보자. 2007년에 아이폰이 세상에 나왔고, 그로부터 2년 뒤 2009년에 한국에서도 판매를 시작했다.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주변에서 아이폰을 쓰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에 나는 모토롤라의 폴더폰을 쓰고 있었다. 내 핸드폰은 기껏해야 전화와 문자 그리고 알람을 설정해두는 것이 전부인데 주변 어른들의 아이폰은 촛불도 켜고 총도 쏠 수 있었다. 충격 그 자체였다. 아 이건 진짜 새로운 거구나. 농구에 죽고 살던 중학생 꼬맹이도 느낄 수 있었다. 앱스토어에는 새로 설치할 수 있는 앱들이 보물처럼 쌓여 있으니 아이폰은 새로 만날 때마다 진화해 있었다.

 그렇게 1년간 짝사랑을 키워가던 중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2010년에 부모님을 겨우 설득하여 아이폰 3GS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삼성, HTC 등 여러 회사에서 스마트폰을 출시했지만 아이폰에 비해 한참이나 뒤처져 있었다. 아이폰을 사용한다는 건 아이폰 그 자체에 대한 신선함과 더불어 아이폰이 보여주었던 월등함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었다. 그렇게 애플빠, 앱등이로 불리는 높은 충성도의 지지층 혹은 광신도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보면 별 쓸모도 그렇다고 재미도 없이 단순한 앱들이 마켓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고, 앵그리 버드를 비롯한 다양한 성공 신화가 탄생했다.

 그중 뉴스와 신문에도 소개되었던 고등학생이 개발한 버스 정보 앱은 나에게도 큰 자극이 됐다. 앱을 만드는 것은 큰 회사나 외국인 어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사실 더 정확히는 '어딘가 크고 돈 많은 데가 만들겠지' 이런 생각에 더 가까웠거나 그 정도의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등학생이라니. 같은 고등학생이라는 것 하나에 근거 없는 자신감을 얻었다. '나도 앱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야심찬 호기심의 씨앗을 심어주었으니 이 지점이 앱스토어 세대의 발상지와 같은 곳이라 할 수 있겠다.

 곧장 인터파크 웹사이트에 가서 인기 있어 보이는 아이폰 앱 개발 책 한 권과 objective C 책 한 권을 주문했다. 하지만 아이폰 앱을 개발하려면 애플의 맥 컴퓨터가 필요하다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열정만 앞서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대학 입시 준비로 서서히 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고 있는 마당에 무작정 매달릴 수도 없었다. 순수했던? 열정을 마음속에 잠시 묻어둔 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2013년에 대학교에 입학했다.

 2013년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해이기도 하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며 등장한 '창조경제' 정책과 맞물려 시대 트렌드였던 '스타트업'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각종 창업 경진대회와 정부 지원 사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적게는 몇 백만 원단위에서 많게는 몇 천, 몇 억 단위의 상금 혹은 지원금으로 대학생들과 예비 창업자들을 유혹했다. 그런 시대적 흐름을 타고 학교에도 창업 활동을 집중해서 하는 팀들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1학년 2학기가 시작되는 날 이른 밤이었다. 학생회관에 들렸다가 신입을 모집하고 있는 교내 창업팀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막연한 기대를 안고 창업팀에 들어갔다. 개인적으로 앱을 만들어보려다가 실패했던 경험 때문인지, 여러 사람이 모여서 만들면 정말로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던 것 같다. 몇몇 앱들의 놀라운 성공을 멀리서 바라보며 부풀었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2017년 8월 10일 목요일

'씀 frees up time for writers to focus on more important thing'

 8월 7일 서울 삼성역 근처 호텔에서 진행된 Google for mobile I/O RECAP 2017 행사에 다녀왔다. 올해 미국에서 열린 Google I/O 행사를 서울에서 말 그대로 recap 해보는 행사인데, 다양한 세션이 A, B, C 구역으로 나뉘어서 30분 단위의 짧은 호흡으로 진행됐다.

 세션 하나하나가 모두 인상적이었다. 같이 간 윤재형과 '역시 구글!'이라는 말을 연발하며 감탄에 감탄을 했다. 하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각 세션에서 소개된 요소들이 각자의 확고하고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한 가지의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말하자면 많은 세션들 중 하나만 듣더라도 Google이 맹렬히 달려가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가 선명하게 그려지며, 어느 순간 그 레이스를 열렬히 지지하는 팬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유튜브로 볼 때와는 다른 몰입감이 있었다. 내년에는 꼭 미국에서 열리는 I/O 본행사를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중 'Design Systems: Making Google Beautiful Around the world (아름다운 디자인을 위한 구글 디자인 시스템의 활용)' 세션은 앞서 말한 경험을 가장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세션이었다.  'Material Design frees up time for designers and developers to focus on more important thing'은 이 세션을 통해서 알게 된 구글 Material Design의 비전이 담긴 문장이다.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비롯한 제품의 제작자들이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시간을 아껴주겠다는 생각은 Material Design 요소만의 문장이 아니었다. 구글의 무궁무진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자리 잡고 있는 각각의 요소들이 제작자의 시간을 아껴서 서비스 혹은 제품 본질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 Android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외에도 모바일 앱을 제작하기 위한 종합 인프라를 제공하는 Firebase, 백엔드 서버 인프라를 책임지는 Google Cloud, 그리고 사용자의 사용성과 편리함 그리고 제작자들의 브랜드를 나타내는 방식을 치열하게 고민하며 트렌드를 이끌어 가는 Google Material Design 등등. 저 문장이 더 힘 있게 다가왔던 것은 실제 앱을 제작하여 운영 중인 제작자로서 구글이 제공하는 서비스들이 말뿐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매 순간 느껴왔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부분에서 진심으로 제작자를 위해 고민하고 개선해온 부분들을 만나며 압도당하곤 한다. 무엇보다 저렇게 거대한 집단이 한 가지 정신으로 뭉쳐서 위대한 일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자연스럽게 우리 팀에 대해 그리고 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Material Design의 말을 빌려 씀의 비전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더 중요한 본질에 집중할 수 있도록 씀이 시간을 아껴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팀과 씀의 각 요소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확고하고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함과 동시에 한 가지의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씀 frees up time for writers to focus on more important thing'




2017년 4월 23일 일요일

나의 치사함에 관하여

 사람이란 게 참 치사하다.
 그냥 내가 치사하다고 시작하면 되는 건데 그러지 못하고 ‘사람들’이라고 싸잡아서 말하고 싶다. ‘나’ 보다 더 넓은 단위의 ‘사람들’이라는 단위로 주체를 바꾸는 것은 '나 자신이 그렇다고 느껴서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만 나만 그런 건 아니지?’하는 일종의 방어기제다.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방어하는 꼴이니 어림도 없고 의미도 없다. 시작부터 구구절절이다.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내가 참 치사하다는 거다. 나의 치사함에 대해 써보고자 하는 글이니 적어도 이 글에서는 방어막을 걷어내고 덜 치사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야 하겠다. 사람이란 게 원래 참 치사한 건지 아닌지 하는 나도 잘 모르는 얘기는 접어두고 최대한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글을 써보고자 한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보자.

 나란 사람 참 치사하다.
 토요일이었던 어제 말도 안 되는 실수가 발견됐다. 그 덕에 팀 동료들이 그것을 수습하느라 주말에 곤욕을 치렀다. 별 생각없이 여유로운 주말을 보내고 있다가 핸드폰을 확인하니 윤재형에게 부재중 전화가 한 통, 팀 카톡방에 몇십 개의 카톡이 쌓여있었다. 무슨 일이 났구나. 불안한 마음을 안고 팀 카톡 방에 들어가 안 읽은 부분부터 위에서부터 읽어내려갔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일까. 잠시 표정관리가 안 되고 멍해지면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상황을 정리해봤다. 사용자들의 글 중 좋은 글들을 주제에 맞게 모아 모음이라는 묶음으로 보여주는 기능에서 해당 글 작성자의 필명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애써 쓴 글이 내 필명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보이고 있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한 사용자 분이 속상함과 당황스러움을 억누르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착하고 배려 깊은 항의 메일을 보내왔다. 그것으로 그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누군가가 그 사람의 글을 베꼈고, 나는 그 베낀 이의 글을 뽑아서 모음에 올려둔 것인가. 그 정도 생각을 해본 후 열심히 수습에 애를 쓰고 있는 대화에 참여했다.

 다시 대화에 들어갔을 땐 사태 파악이 조금 더 진전돼 있었다.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할 때 실수가 있었던 것이라는 진단이 내려졌고, 즉각 수정을 진행 중이었다. 추측했던 원인 중 하나인 무단 도용 가능성을 확실히 배제할 수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대화방에 질문했고, 무단 도용은 지금 문제의 원인에서 확실히 배제할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행이었다. 더 이상 이 상황 전체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무단 도용된 글을 선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것에 대해 다행스러운 마음이었다. ‘무단 도용 문제는 아니니, 그건 다행입니다. 더 신경 쓰고 확인했어야 했는데 부주의해서 서비스와 사용자에게 상처를 준 것에 그리고 이렇게 불필요한 고생을 하게 만든 것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진행되고 있는 상황의 급박함과 쑥스러움을 핑계로 ‘아하 다행이네’,  ‘쏘리’라는 말과 함께 울고 있는 이모티콘을 같은 마음으로 보냈다.

 어이없는 실수를 수습하며 곤두서있던 신경에 상황에 ‘다행이네’가 포함된 별 쓸모도 없는 말들이 화를 돋운 것인지 퉁명스러운 반응이 돌아왔고, 그 말들은 아프게 다가왔다. 억울했다. 단지 나도 일부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그때의 몹쓸 정신 상태와 부주의를 반성하고 팀의 소중한 주말에 균열을 준 것에 대한 진심 어린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믿어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당연히 상대방의 투박한 말들에도 생략되어 있는 말들이 많았을 것이며 텍스트 소통의 한계로 의미가 왜곡되어 해석됐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두가 내가 믿고 있던 데로 생각해주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상황이 일단락되고 나서 그 말이 머릿속에 그 말이 맴돌았다. 문제를 초래한 것은 나이고 그 문제 때문에 고생시킨 것이 먼저이니 무엇이든 달게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겉으로 그런 척하고 속으로는 쓴맛을 느끼고 있었던 것에 한 번 치사했고, 저 퉁명스러운 말들은 벌어진 상황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서 두 번, 지난날 타인의 실수에 대한 나의 반응과 배려를 철저히 주관적으로 떠올려본 것에 세 번 치사했다.

 기력 증진을 위해 종종 개고기를 먹였다던 양궁선수의 부모님과 그 선수에게 쌍욕으로 비난하면서 자신의 애견에게는 기력 증진을 위해 살살 녹는 소고기 업진살을 먹이던 이중성을 보며 그 사람의 치사함에 대해 치를 떨었는데,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수와 실수를 한 사람에 대한 반응은 의도가 어쨌든 누군가의 기분이 나쁘게 혹은 아프게 할 수도 있었으니 딸을 위해 개고기를 먹였던 양궁선수 부모님과 같고, 그것에 대한 나의 반응은 업진살 아주머니의 이중성과 오지랖과 같았다.

 요한복음 8:3-11에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이 불행한 여자를 연민하거나 잘잘못을 따져보자는 것이 아니다. 이 대목의 중심은 ‘먼저’에 있다. 돌로 칠 때 치더라도 그전에 나는 진짜 허물이 없는지 돌이켜 보라는 것이다. 살면서 치사한 일들을 참 많이 보게 된다. 그 치사함을 비난하기 것 이전에 나의 치사함을 먼저 되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보통 상대방만 치사하고 나는 전혀 치사하지 않았던 때가 없거나 거의 없기 때문이다.

2017년 4월 5일 수요일

퇴근길에 비가 내리면

 퇴근길에 발 디딜 틈 없는 버스에 타면 서로가 서로의 불쾌함이 되고, 그 불쾌함으로 인해 서로는 서로의 불행이 된다. 이런 날에는 괜히 창밖에 내리고 있는 비가 원망스럽다. 비가 내리는 탓에 사람들 사이의 그나마 있던 틈도 메워지고 있어서일까.

 사람들은 서로가 불쾌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떨어져 있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 비행기의 비즈니스 석에서 이코노미 석보다, 가격이 비싼 식당에서 싼 식당보다, 월세가 비싼 집에서 싼 집보다, 좋은 차에서 싼 차보다 더 멀리 다른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다.

 불쾌한 북적거림을 피하는 것에 돈을 지불하기 부담스러운 다수의 사람들은 서로를 자석처럼 끌어당기듯 살아간다.

2017년 3월 31일 금요일

오늘과 같은 하늘의 어느날

 3월의 마지막 날이다. 흐리고 우중충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가끔 떨어진다. 올 듯 말 듯한 비처럼, 봄은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다. 날씨는 종종 비슷한 날씨였던 지난 어느 날의 기억을 끄집어내곤 한다.

 길었던 겨울을 지나 봄으로 들어가는 초입, 딱 작년 이맘때에 울산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짐을 실은 용달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왔다. 그날도 오늘과 같은 흐린 하늘이었고 비가 조금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그 해의 겨울은 상상하기도 아득할 만큼 멀리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어느새 그 겨울도 왔다 가고 1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라면을 끓일 냄비도 커튼도 없던 원룸에 우당탕탕 도착했던 날, 막막하기만 했던 이곳도 이제 단골이된 고깃집과 자주 가는 미용실이 있는 익숙한 장소가 되었다.

 여전히 올해의 겨울도 상상하기도 아득할 만큼 멀리에 있다고 느껴진다. 아득하기만 한 올해의 겨울이 다시 왔다 가면 내년의 겨울의 끝에서 오늘의 하늘과 날씨를 다시 만나게 될까. 그리고 그때의 나는 올해 혹은 작년의 그날을 떠올리고 있을까. 

2017년 3월 28일 화요일

글을 통해 사람을 만나다.

 우리는 왜 글을 쓸까.

 영화 '동주' 를 봤다. 그리고 얼마 후 우연히 ‘송몽규’ 선생님 역을 맡았던 배우 박정민이 이번 영화에 임했던 마음가짐과 소감을 글로 남긴 것을 읽었다. 재미있게 본 영화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던 배우를 글로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이 배우 생각도 깊고 글도 재미있게 잘 쓰네’ 싶어서, 혹시나 하고 다른 글들이 있는지 찾아 보았다. 역시나 꾸준히 칼럼을 연재하고 종이책으로 출판까지 했던 글쟁이였다. 당장 책을 사서 읽어보고 더 깊은 팬이 됐다.

 단순히 새롭게 등장한 배우 중 한 명일 수 있었던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연기에 임하고 있는지, 연기자가 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어떤 과정으로 배우가 되었는지를 글을 읽으며 꽤 깊게 알 수 있었다. 앞으로 그 배우를 영화 속에서 만나게 된다면 표정, 말투, 몸짓 하나하나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전에도 토론의 달인 유시민을, 영화감독 박찬욱을, 방송인 허지웅을, 가수 이석원을 글로 만나면서 이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비로소 진짜 이 사람들 각자를 만난 기분이었다. 누군가를 글을 통해 만난다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을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전 보건 복지부 장관 혹은 현 작가 유시민의 생각과 발언들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방송에서의 허지웅의 말들이, 언니네 이발관(이석원)의 음악들이, 배우 박정민의 연기가 그 사람들의 글을 통해 조금 더 완전하게 다가온다.

2017년 3월 27일 월요일

뭣이 중헌디!

 다녔던 학교에서는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했다. (아직 졸업은 못했고 휴학 중이니 다니고 있는 학교라고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정말 피할  없는 상황이 아니면 수업 시간에 자발적으로 질문하거나 발표하지 못했는데 얼마 전에  이유를 알게 됐다.
 조정래 작가님의 소설 정글만리에는 중국 북경대학교 학생들과 미국 유명 언론이 인터뷰를  진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인 유학생인 주인공은 영어 실력이 뛰어나건 부족하건 아랑곳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중국 학생들을 보고, 한국과  다르구나 하며 놀란다. 어떻게 그럴  있냐고 여자친구에게 물어보는데  중국인 여자친구의 답변이  놀랍다. 여긴 중국이지 않냐는 것이다. 중국에서 영어를 조금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 흠이냐, 본인의 생각을 전달하는  자체가 중요한  아니냐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뒤통수를 맞은  얼얼했다.  장면을 읽으면서 나만 이런  아니고 한국인들 대부분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사람들에게 나의 모자란 영어가 비웃음거리가 수도 있다는 쓸데없는 두려움이 있었고 머릿속으로  번이고 표현을 고쳐보는 중에 기회는 지나가 버렸다. 아무리 인터내셔널 캠퍼스를 표방하고 있다고 한들 여긴 한국이고 한국인 학생이 90% 이상인데 말이다.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많이 있었겠지만, 나와 비슷했던 학생들은 괜히 서로가 서로를 움츠러들게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가지만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여긴 한국이다. 한국에서 영어에 조금 유창하지 않다는 것이 무엇이 흠이냐.
 살다 보면 종종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정작 중요한 것들은 따로 있는데 이상한 것에 온통 신경을 쓰고 움츠러들어 일을 그르치게 되는 상황. 영화 곡성의 명대사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뭣이 중헌디!”